요사이 TV를 보면 ‘니가 게 맛을 알어?’와 ‘이모는 참 몰라!’하는 상업 광고가 눈에 잘 띤다. 이 광고 문구들의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사이, 서로 이율배반된 동의어로 다가오는데 왜 새삼스럽게 느껴질까?

과연,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무엇을 얼마큼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몇 개의 기초적인 세상이치만 배우고도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안 것처럼 우쭐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을 알았나 싶어 자신감을 갖다가도 바로 그것이 모르는 것임을 깨닫고 한없이  부끄러워한다.

사진에 관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하면 할수록 재미있어 뛰어들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고 ‘내가 무슨 사진을 하나?’ ‘왜 사진을 하는 건가?’ 등 온갖 회의 속에 때로는 깊이 절망하기도 한다.

‘창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또한 사진에서 ‘표현’이란 무엇일까? 이런 저런 전통과 범주의 틀 안에 갇힌 채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안개 속에 뿌연 허상뿐이다.

나는 가끔 음악에서 작곡과 연주를 창작과 표현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이것을 사진 쪽에 대입시켜 본다. 진실로 사진은 창작과 표현의 영역 중에서 어느 쪽의 비중이 더 클까?


작품을 생각할 때면 나는 어린 시절, 모 초등학교 선생님께 들은 얘기가 항상 생각난다.

 

광복 직후 미군정 시대 초등학교 미술시간의 일이었다. 선생님이 빨간 사과를 교탁 위에 올려놓고 아이들에게 그리라고 했는데, 어떤 한 아이가 사과의 색깔을 까만 크레용으로 새까맣게 칠하고 있었다. 이를 본 선생님은 수업참관자가 볼 까봐 당황해하며 ‘까맣게 칠한 사과 그림’을 빼앗아 교탁 속에 넣고 새로운 도화지를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사과는 빨간색이니 빨간색으로 칠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선생님 말씀대로 사과를 빨간색으로 칠하였다. 그리고 수업은 끝났다. 

그런데, 수업을 참관하던 학무국 소관의 미국군인은 수업이 끝나자 교탁 속에 넣어 둔 그 ‘까맣게 칠한 사과 그림’을 아이의 승낙을 받고 가져갔다. 교장실에 온 미국군인은 선생님을 불러서 ‘왜 ‘까맣게 칠한 사과 그림’을 빼앗았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빨간 사과를 까맣게 칠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미국 군인은 ’사과는 빨간색이지만, 만일에 그 아이가 빨간 사과 한 개를 어머니 몰래 훔쳐놓았다가 캄캄한 벽장 속에 숨어서 그것도 동생이나 형들을 따돌려놓고 혼자 맛있게 먹었다면 과연 그 때 그 사과 색깔은 무슨 색으로 보였을까? 라고 물었다. ………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나는 강의 중에 기회가 맞을 때면 곧잘 위의 이야기를 예로 들곤 한다. 그리고 ‘까맣게 칠한 사과 그림’ 얘기처럼 이 세상 색의 이미지는 절대적 개념과 상대적 개념 중 어떤 해석과 느낌으로 다가오며, 그것은 나중에 누구의 몫으로 남는 것일까? 를 생각해본다.

카메라의 발달사는 셔터의 발달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니엡스가 8시간 노출로 ‘지붕’을 촬영한 이래, 21세기에 접어든 현재의 카메라는  1/4000 셔터, 1/8000 셔터까지 발전(?)하였다. 이 얼마나 빠른 셔터포착인가? 날아가는 새가 아니라 날아가는 총알도 찍는다. 로버트 카파의 전쟁사진이나 까르띠에 브렛숑의 결정적 순간, 그리고 삼 쉬이어의 비행선 한덴부르그호의 폭발 등은 바로 셔터의 미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어다.

사진은 빛이 없으면 안 된다. 빛은 필름이나 CCD(디지털)에 비쳐 실물과 똑같게(?) 찍는 작동이 사진에서 제 1 단계 촬영이다. 때문에 행복한 장면이나 추억의 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거나 어떤 사건에 증거가 필요하면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처음에는 ‘사진은 똑같다’라는 개념인식이 우선이었다.

또한 어느 색이든 무한히 빛을 더하면 흰색이 되고 무한히 빛을 빼면 까만 어둠이 된다. 나는 간단한 이 원리가 재미가 있어 유희(遊戱)로 즐긴다.

사진은 찍는 사람이 대상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하다면 그 삶의 몫을 어느 때는 이런 색깔로 칠하고 어느 때는 저런 색깔로 칠하는 한 뼘 자유가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내 앞에 시작과 끝의 두 점이 있을 때, 자기식의 계산법을 알아차렸다면 그에 따라 희망과 절망, 어둠과 밝음, 비교와 대조 등은 상반된 개념의 색깔로 바뀌고 어느 덧 시간과 공간은 하나로 집착되어 어른거림을 본다.

 

‘예술은 빵은 아닐지라도 반찬은 된다’는 말이 있다. 빵이 칼로리라면 반찬은 맛과 멋이다. 주식에 부식을 곁들여 먹을 줄 아는 문화가 반찬문화라면 동물에겐 이런 문화가 없다. 오직 양육강식에 칼로리의 쟁탈만이 삶의 본능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동물에겐 문화가 있을 수 없고 맛과 멋을 모르는 셈이 된다.

나에게 사진은 칼로리의 문제가 아니라 한 소절 삶을 ‘곁들이는 여유의 즐김‘이다. 마음껏 양팔을 펴고 기지개를 키면 그 안에 들어오는 공(空)과 색(色)은 나에겐 아름다운 자유로움으로 남는다.

   

이번 ‘농민2002’ 사진집은 한국 농민을 제재로 하여 21세기에 접어든 시점을 전후해 찍은 것이다.

밝음과 어둠의 프레임 속에서 느낌의 상반성과 동질성, 똑같이 복사된 프레임과 확대된 프레임을 통해 보여지는 이질성과 동질성 등 서로 교차되는 두 점의 프레임 전환이 주는 느낌이 어떨까 하는 것이 ‘농민2002’ 과제의 출발이었다.

한국의 IMF는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 오듯 온 것이 아니다. 가을비에 옷 젓듯 오랜 시간동안 다가오고 있었지만 알면서, 느끼면서도 몰랐던 것은 아닐까. 한 번쯤은 왔어야 했다고 역설적인 이야기도 나온다. 농촌의 생계 환경과 농민들의 정신 속에 스며든 IMF는 과연 언제쯤 끝날 것인가? 안타깝게도 농촌을 거닐다보면 가면 갈수록 태산임을 느낀다.


그 동안 사진집이 나오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여러 선배와 이웃 동료들에게 감사한다. 더욱이 두 번에 걸쳐 사진집이 나오게끔 도와준 오춘근님과 이번 사진집에 많은 상담으로 도움을 준 김정우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2002. 10.)